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늙어가는 아내에게

더큰그림 2015. 2. 21. 12:48

늙어가는 아내에게

 

내가 말했잖아.

정말, 정말, 사랑하는, 사랑하는, 사람들,

사랑하는 사람들은,

, 나 사랑해?

묻질 않어

 

그냥, 그래.

그냥 살어

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

말하지 않고, 확인하려 하지 않고,

그냥 그대 눈에 낀 눈 꼽을 훔치거나

그대 옷깃의 솔 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 보이는 게야

 

(중략)

 

이제는 세월이라고 불러도 될 기간을 우리는 함께 통과했다

살았다는 말이 온갖 경력의 주름을 늘리는 일이듯

세월은 넥타이를 여며주는 그대 손 끝에 역력하다

이제 내가 할 일은 아침 머리맡에 떨어진 그대 머리카락을

침 묻힌 손으로 짚어내는 일이 아니라

그대와 더불어, 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리라

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

힘없는 소리로, 임자, 우리 괜찮았지?

라고 말할 수 있을 때, 그때나 가서

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때나 가서

할 수 있는 말일 거야

 

- 황 지우(시인/한국예술 종합학교 교수, 1952~)